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문단 편집)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술라는 놀라를 떠나 그리스에 도착한 뒤 아테네를 공격했다. 로마의 군사력이 강한 것을 보고 로마에 붙기로 결심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술라에게 사절을 보내 협력하겠다고 제안했고 술라는 이들을 모두 환영했다.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한 뒤 곡식을 철저히 차단하여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듬해 술라는 북상하여 카이로네이아에서 아르켈라우스가 이끄는 [[폰투스]]군을 맞아 싸웠다. 이때 로마군은 40,000여명이었고, 폰투스군은 120,000명이었다. 이곳에서 술라는 적이 돌투성이었던 언덕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것을 발견하고 즉각 싸움을 걸었다. 즉, 팔랑크스를 쓰기에 좋지 않은 로마군의 언덕 아래에 폰투스군이 포진한 것. '''적 사령관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고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로마군은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데다 지형적 유리함도 있어 싸움은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폰투스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술라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원하여 격퇴했다. 곧 중앙과 우익에서도 폰투스군이 격퇴되면서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사료를 남긴 로마 시대 역사가인 [[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폰투스군은 '''11만이 죽었고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이 정도 손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현대전과 달리 고대전에서는 전투 중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사자는 후퇴 중에 발생하고, 보통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병사는 전사자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군은 현장에서 즉사한 군인만 따로 집계하고 적군은 추정 살상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수치이기도 하고, 로마인들이 기록한 전투들의 사상자 비율이 실제보다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통설이므로 이 수치 역시 제법 과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폰투스군을 대파한 술라는 집정관 킨나가 파견한 로마 정규군과 조우했다. 로마 정규군은 마리우스가 죽고 후임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86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이끌고 있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하였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는 대신 북상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기로 했고 술라는 이들 플라쿠스군을 쫓는 대신 남하하고 있는 폰투스군을 맞아 오르코메노스 곶으로 이동했다. 오르코메노스에서 술라는 폰투스군을 상대로 한쪽엔 [[참호]]와 도랑을 파 놓고 다른 편에 군대를 보내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했다. 한쪽은 호수인데다 참호와 도랑으로 압박을 당한 폰투스군은 패주했고 이로써 폰투스군은 대패했다. 이때 참호를 파서 싸운 것은 전사에서 최초로 참호에 병사를 둔 뒤 싸운 예라고 한다.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폰투스가 동원한 병력이 80,000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록에 따른다면 120,000명 중 110,000명이 죽고 나서도 뒤이어 80,000명을 동원했다는 말이 된다. 동원력으로 친다면 폰투스는 [[중국]]의 거대한 왕조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폰투스의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이탈리아]] 반도보다 작았고, 또한 이미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시칠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던 강대국 로마가 동원한 병력이 50,000여명인 것을 비교한다면 이토록 로마군을 웃도는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잡병을 징집해서 죽창 들려 내보내는 것이었다면 8만이 아니라 80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의 모든 로마, 이탈리아의 시민들을 학살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인간성을 보면 자신의 영토에서 마구잡이로 징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친인척 제거는 물론 키오스인의 씨를 말릴 정도로 잔학했다. 이렇다면 술라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의 폰투스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는게 가능하다. 녹색 부분이 폰투스 왕국, 단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저 밑의 아나톨리아(이스탄불 동쪽의 터키 지역)를 완전히 지배 하에 넣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 로마에 비하면 한줌 정도밖에 안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stMithritadicwar89BC.png]] 그러나 양국의 군사 제도를 보자면 로마군은 로마 시민만 지원이 가능한 데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에 모병제였다. 따라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시민권법에 따른 '''기존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만 모병대상이었다. 반면 폰투스는 전제군주인 왕의 재력으로 고용한 용병과 징집병이 주력이었다. 즉 아나톨리아 전체가 폰투스의 병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폰투스는 보스포루스를 기반으로 스키타이까지 영향을 확대했기 때문에 스키타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국의 상황을 보자면 우선 로마는 동맹시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삼니움이란 불씨는 남아있었고[* 술라의 부하 메텔루스 피우스는 술라의 원정 동안 이탈리아에 남아 삼니움의 파피우스 무틸루스를 상대하기 바빴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즉, 로마의 술라 정부는 마리우스라는 강력한 적이 주적이고 동방의 적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적이었다.[* 그럼에도 술라가 동방으로 원정간 이유는 원래 본인이 적법한 대 폰투스 사령관임을 보여주면서 외적을 격파하며 마리우스에 대항할 군공을 얻기 위함이었다. 적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술라가 폰투스를 멸망시키지 않고 조약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던 것도 마리우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 덕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 주둔한 병사들이 속속 마리우스에 가담하고, 삼니움족도 마리우스를 지원하면서 로마는 마리우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피케눔에서 4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었던 사령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술라파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피케눔 출신의 병사들은 와해되었고 이탈리아 출신인 마리우스를 따랐다.] 반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만이 적이었고 서방으로 빠르게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와의 전쟁에 모든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고 로마는 일부만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시아와 킬리키아의 속주 주둔군을 이미 격파한 상태였으며 그리스까지 손을 뻗고 있는 상태였다. 원정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한 폰투스는 많은 자금을 확보한 상태라 술라에게 패하고도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는 동맹시 전쟁으로 인한 군비 차출로 국고가 바닥나 있었다. 집정관 술라는 가까스로 군비를 마련하고 6개 군단을 이끌며 원정을 떠났는데 그리스에서도 신전을 약탈할 정도로 군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스 신전은 로마 종교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보통 자금이 부족한 수준으로는 약탈하지 않는다.] 즉, 폰투스 측의 군세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설사 과장이 아니더라도 완전 불가능한 수의 병력은 아니었고 로마에서는 내전과 경제 상황, 동맹시 전쟁의 휴우증 때문에 적은 병력만을 출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폰투스를 이긴 원인은 술라의 군사적 재능과 로마 병사의 질(술라를 따라 삼니움을 격파한 정예병이었다), 폰투스 장교들의 무능함이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총사령관의 역량이다.''' 술라가 쓴 전술은 폰투스의 전차와 팔랑크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폰투스의 전차나 팔랑크스가 오면 로마 보병은 양측으로 비키며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 무력화시켰다. 결국 보병전을 벌여 로마 군단병이 폰투스군을 격파했다. 즉, 술라의 전술은 효과적이었고 전투에 승리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폰투스군이 훈련이 덜 되었던 점도 있었다. 로마와 폰투스의 전쟁을 쭉 보자면, 술라의 원정 이전에 동방에 파견된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기원전 101년 집정관)|아퀼리우스]]와 카시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공격하다 크게 패배했던 반면 술라와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같이 뛰어난 지휘관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 술라가 남겨놓은 로마 사령관 리키니우스 무레나도 폰투스에 탈탈 털리고 로마로 귀국한다. 패주한 폰투스군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철수하였고 북상 중인 플라쿠스군은 이들을 추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플라쿠스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는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투스군을 맹추격하길 원하였고 그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투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는데 핌브리아는 이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으므로 플라쿠스를 배신했다. 집정관 플라쿠스는 달아나다 붙잡혔고 핌브리아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토록 술라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 파견된 로마 정규군은 막장으로 치달았으나, 이들을 무시한 술라는 그리스 섬들을 점령하는 데 전념했다. 핌브리아의 로마군은 터키 지역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잔존 병력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핌브리아군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여 그를 페르가눔이라는 도시에 몰아놓고 포위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배를 타고 피타네라는 도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했으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음을 안 핌브리아는 술라의 명령으로 [[해군]]을 편성했던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핌브리아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를 들은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했다. 배를 타고 달아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를 만나 강화를 맺었다. 이때 미트리다테스 6세는 70여 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해군을 모두 술라에게 넘기고, 3,000 [[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포로가 된 폰토스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는 것 뿐인 아주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탈리아인과 로마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온건한 강화를 맺은 술라에게 병사들이 너무 관대하게 강화를 했다고 불만을 말하자 술라는 지금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하지 않으면 궁지에 몰린 그가 핌브리아군와 연합하여 우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지금 처한 상황을 논리있게 차분하게 설명해서 병사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핌브리아군은 이러한 강화조약이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계속 터키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고 술라는 이들과 맞서기 위해 터키 지역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술라와 싸우려고 했으나 핌브리아의 병사들은 핌브리아를 따라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하였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했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터키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이러면서 여러 신전들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한편 로마의 통치자였던 킨나[* 마리우스의 지지자로 마리우스의 정권 탈취를 도왔다. 흥미롭게도 이 인물 역시 술라처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다. 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는 이렇게 로마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맞서게 된다.]는 술라와 맞서기 위한 군대를 모아 일리리아를 향해 행군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킨나의 군대는 술라와 싸워봐야 전리품을 많이 얻을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싸우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가령 술라군의 경우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응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약탈의 기회가 많았다. 약탈은 병사들에게 있어 한 밑천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킨나의 군대는 술라군을 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겨봐야 약탈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은 킨나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았는데 킨나의 상대인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이미 유구르타 생포, [[게르만족]] 격파, [[동맹시 전쟁]] 승리 등 여러 전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장[* 이 때문에 옵티마테스 파로 시민에게 인기없었던 그가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이었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도 연이은 대승을 거두어 당대에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병사들은 킨나가 술라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전리품도 얻을 가능성도 별로 없는 데다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싸워야 하니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상당히 내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킨나는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쓰기보단 오히려 그들에게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병사들은 킨나에게 불만이 쌓인 터에 킨나의 수행원이 보초를 서던 병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하자 병사들이 완전히 분노하여 킨나와 그의 일행을 집단으로 공격해서 모두 살해했다. 킨나가 평소에도 술라와 다르게 병사들에게 인망이 없던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